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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마라도나 충격적인 사망 소식과 인생 일대기

마라도나 충격적인 사망

소식과 그의 인생을 알아보자. (스페셜 골 영상)

 

마라도나

 

 

 금일 새벽 충격적인 마라도나 사망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펠레와 함께 축구 역사에 양대산맥을 손 정 하면 빠지지 않는 선수는 바로 디에고 마라도나였습니다. 다른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 라는 축구계 격언을 무너뜨린 선수입니다. 개인의 힘으로 ssc나폴리의 구단 첫 우승과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우승을 이끈 슈퍼스타였습니다. 그는 선수 시절 말은 스피드와 막을 수 없는 드리블 기술로 상대 수비를 공개하는 것은 물론 마무리까지 가능했던 공격수였습니다. 하지만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라는 호칭에 속에서도 흑역사를 가졌고 아아 통 질이다 분했던 하나이기도 합니다.

25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티그레 자택에서 숨졌습니다. 11월 3일 경막하혈종 증상으로 수술을 받았고 일주일 만에 퇴원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심장마비로 별세했습니다.

 

 

마라도나 데뷔

 

 축구 실력만큼이나 다사다난했던 그는 지금부터 파란만장했던 그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그는 1960년 10월 30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모두에게 인정받는 초특급 유망주였습니다. 이미 1976년 16세의 나이로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소속으로 데뷔하여 역대 최연수 출전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그는 데뷔 경기 후반전 교체로 투입되자마자 일방적으로 밀리던 경기 양상을 단숨에 반전시켰습니다. 다음날 아르헨티나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 것 어쩌면 당연한 입니다. 그의 실력이 얼마나 빼어난 것인지 훗날 아르헨티나 축구국가대표팀 감독이 된 호세 페케르만과 1군 선수들 모두가 일찌감치 훈련을 끝내고 유소년 팀의 그를 지켜본 적도 있습니다. 마라도나 골 스페셜 영상을 잠시 보고 가겠습니다.

마라도나 스페셜 영상 바로가기

 

데뷔 이후 스타덤에 오른 그는 1976년부터 1981년까지 아르헨티노 주니어스에서 총 167경기 115 골을 기록했습니다.  특히 1978년, 1979년, 1980년 3 시즌 연속 득점왕에 올랐습니다. 18살의 나이에 팀의 주장을 역임하면서 리그 최우수선수에 등극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된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 1979년 세계 청소년 월드컵에 나선 그는 압도적인 기량을 바탕으로 아르헨티나를 우승시키고 대회 최우수 선수로 선정됐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월드스타 대우를 받았습니다. 당대 브라질에서 세계 최고 선수로 손꼽히던 전성기의 지코를 누르고 남미 올해의 선수에 의 2년 연속 선정된 것이 증거입니다. 당시 마라도의 나이는 고작 10대 후반, 20대 초반이었는데 어린 나이에 개인 능력을 이미 당대 최고라고 평가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1981년 아르헨티나 최고 명문 클럽인 CA 보카 주니어스로 이적했습니다. 역대 최고 이적료를 경신한 것은 물론 이적 직후 팀의 우승을 끌었습니다. 보카 주니어스에서 1년 6개월간 간 반짝 활약한 그는 1982년 스페인 월드컵을 마치고 스페인 명문 바르셀로나로 이적합니다.

 

 

악동의 탄생

 

 바르셀로나에 입단할 당시의 이적료는 300만 파운드에 달했습니다. (한화 47억 원) 당시 최고의 이적료였죠. 그는 이적 후 1982~83, 1983~84 두 시즌을 뛰며 58경기 38 골을 기록하며 좋은 활약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이적 첫 시즌은 간염으로 고생했고 병을 이겨낸 두 번째 시즌엔 아틀레틱 빌바오 선수에게 악의적인 태클을 당해 발을 크게 다칩니다. 선수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큰 부상을 당한 그는 아르헨티나로 돌아가 재활치료에 만 6개월 이상을 소비합니다. 계속된 부상 탓이었을까 그는 이 무렵부터 사생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르셀로나 구단은 대해 그의 기행에 지쳐갔지만 그는 바르셀로나로 돌아가 다시 화려한 플레이를 펼쳤습니다. 팀을 코파 델 레이 결승 전까지 올렸습니다.

 

마라도나 바르셀로나

 

 무상 복귀 이후에도 그의 실력은 의심할 여지없이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코파 델 레이 결승 상대가 하필 자신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혔던 아틀레틱 빌바오였습니다. 이 경기에서 양 팀 선수들은 치열한 신경전을 펼쳤고 결국에는 난투극까지 이어졌습니다. 빌바오 선수들은 또다시 집요하게 그의 발목을 잡아 태클을 시도했고 화가 났던 그는 상대팀 코칭스태프를 가격합니다. 바르셀로나와 빌바오의 선수들은 그대로 패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출장 정지를 당했고 바르셀로나의 수뇌부도 더 이상 그를 품지 못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세리에 A 이적을 결단했습니다.

 

 

나폴리의 신이 되다

 

나폴리 구단은 그가 오기 전과 후로 나뉩니다. 나폴리는 내세울 만한 우승 커리어가 전무했고 강등권을 왔다 갔다 하는 중 중하위권 팀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합류로 나폴리에 대한 시선은 180도 달라졌습니다. 나폴리는 1987~88 시즌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이탈리아 세리에 a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는 리그 27 경기에 출전해 15골 1 도움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바르셀로나 시절엔 화려한 드리블 위주의 천재성이 보이는 패스로 게임을 풀어나가는 포워드였다면 나폴리에서는 화려한 플레이를 자제하는 한편 팀플레이와 플레이 메이킹 위주로 경기에 임했습니다. 1987~88 시즌이 끝나고 브라질 공격수 카레카까지 합류하며 마-지-카 공격진 라인이 형성됐습니다. 그는 나폴리 유니품을 입고 역대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입지를 공고히 했습니다. 이어 나폴리의 1987~88 시즌, 1988~89 시즌 준우승을 이끌었습니다. 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 못했지만 나폴리는 1988~89 시즌 구단 역사상 최초로 유럽 축구 연맹 컵 코파 이탈리아까지 거머쥐며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만년 중하위권 팀이었던 나폴리가 더블을 달성한 것입니다.

 

 

나폴리 우승

 

 

 이때 그가 선보인 활약 때문에 지금도 이탈리아 나폴리 지역에서 그의 인기는 신에 버금갈 정도입니다. AC밀란이나 인터밀란, 유벤투스 등 상대적으로 부유한 북부 구단을 만나 패배가 당연했던 중하위권 팀 나폴리를 혼자 힘으로 리그 우승과 UEFA컵을 우승으로 이끌었기 때문이죠. 당시 그를 막아야 했던 AC밀란의 전술가인 아리고 사키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압박 축구를 고안해 낸 것은 마라도나를 막기 위해서였다. 나폴리는 그가 떠난 이후 아직까지 리그 우승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플리가 그의 등번호 10번을 영구 번호로 지정한 건 당연한 헌사 일지도 모릅니다.

 

 

월드컵을 제패한 신의 손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그는 자국 최고의 유망주를 넘어선 스타였습니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감독의 마라도나를 엔트리에 포함시키길 바랬으며 본인도 월드컵 출전을 갈망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아르헨티나의 메노티 감독은 프로무대 2년 차인 18살 청소년이 월드컵에 출전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는 발탁을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그 없이 월드컵에서 우승했고 역사상 최고의 스타로 군림하게 했으니 결과적으로 윈-윈이었습니다. 나폴리 이적 이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전성기에 접어든 그는 8년 뒤 개인의 힘으로 아르헨티나를 월드컵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조별리그 a 조였던 이탈리아, 불가리아, 대한민국과 한 조에 속했는데 팀을 조의 1위로 16강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16강 우루과이를 상대로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줬고 팀은 1:0으로 승리해 8강에 올랐습니다.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는 축구 역사에 남을 득점이 터졌습니다.

 

 

신의손1

 

 그는 후반 6분 크로스가 올라오자 잉글랜드 피터 쉴틈 골키퍼 함께 동시에 점프했어요. 이마가 아닌 손으로 공을 쳐 득점했습니다. 유명한 신의 손 사건입니다.

 

신의손2

 

명백한 핸드볼 파울이었지만 당시 심판은 반칙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득점으로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핸드볼 논란도 잠시 그는 중앙선에서부터 드리블로 골키퍼를 포함한 9명을 제치고 득점해 잉글랜드 팬들을 녹아웃시켰습니다. 당시 득점을 지켜본 아르헨티나 해설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축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 11명이 하는 스포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축구의 개념을 벗어난 최초의 선수를 보고 있습니다. 그의 활약은 이어졌습니다. 준결승 상대인 벨기에를 상대로 얼티 골을 터뜨리며 팀을 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월드컵 우승

 

 

 결승에서 서독을 3대 2로 무너뜨리며 우승컵을 들어 올렸습니다.

 

국가대표 우승

 

 특히 그는 2:2로 팽팽하던 후반 전 막판에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며 결승전의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마라도나의 몰락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기점으로 급격한 몰락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나폴리는 최악의 빈민도시이자 범죄 도시였습니다. 또한 이탈리아 3대 마피아 중 하나인 카모라가 위세를 떨치던 시기였습니다. 그들은 나폴리의 영웅인 마라도나와 밀접한 관계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의 몰락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의 발언도 몰락의 시발점이 됐습니다. 이탈리아 월드컵 준결승 전입니다. 하필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의 맞대결이 성사됐습니다. 두 팀의 경기는 마라도나가 뛰던 나폴리의 홈구장인 스타디오 상파울루에서 열리게 되는데 이 경기를 앞둔 그는 나폴리 시민들은 이탈리아가 아니라 나와 아르헨티나를 응원하고 발언했습니다. 이 발언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습니다. 이탈리아 언론은 그가 이탈리아의 지역감정을 들먹이며 이간질했다며 엄청난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더불어 아르헨티나가 이탈리아를 꺾고 결승에 진출하게 되면서 일은 더욱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이탈리아 언론, 사법 당국, 세무 당국 등 모든 이탈리아인들이 그에게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한 순간에 나폴리의 신에서 이탈리아의 악마로 추락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는 신고를 당해 엄청난 벌금은 집행유에, 이탈리아 리그 15개월 출전 금지 징계를 받게 되면서 나폴리를 떠나게 됐습니다. 

 

 

허풍쟁이 감독

 

그는 역사상 최고의 선수였지만 감독으로는 별 볼 일 없었습니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말만 그럴듯하게 하는 허풍쟁이 감독이었습니다. 1994년 아르헨티나의 택 스틸만 디유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는데 라싱 클럽을 거쳐 2008년 10월부터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당시 그는 리오넬 메시를 중심으로 월드컵을 우승하겠다고 말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습니다. 조별리그 나이지리아 전 1:0 승리, 한국전 4:1 대승. 그리스까지 무난하게 누르고 16강에 올랐습니다. 16강 멕시코를 3:1로 이겼지만 경기력은 멕시코가 더 좋았다는 국가가 많았습니다. 여기에 일부 오심 논란까지 불거졌죠. 하지만 8강 진출에는 실력도, 운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독일과의 맞대결에서 일방적으로 밀리며 0:4로 무너졌습니다. 지금도 아르헨티나 축구 역사의 최악으로 남는 경기입니다. 그는 메시만 믿었고 별다른 전술이 없었습니다. 반면 독일을 팀으로 싸웠습니다.

 

감독

 

 메시가 막히자 그는 별다른 전술적 혜안을 보이지 못하고 머리만 감싸 쥐었습니다. 감독으로서 큰소리를 내기에는 지도력 자체가 부족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 국가대표팀 지휘 이후 감독으로서 영향력은 크게 줄었습니다. 이후에는 주로 변방 국가의 프로리그 팀을 맡았습니다.

 

 

 팀 스포츠인 축구에서 혼자의 힘으로 소속팀과 대표팀의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그를 추종하는 세력이 있을 정도로 선수 마라도나는 훌륭한 선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다만 범죄와 기행은 그에 대한 평가를 극단적으로 나뉘게 한 요소입니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업적은 축구계에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